유관순(柳寬順)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에서 태어났다.
공주 영명여학교(永明女學校)에서 수학한 뒤 1916년 기독교 감리교(基督敎 監理敎) 충청도 교구(忠淸道敎區) 본부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宣敎師)의 주선으로 이화학당(梨花學堂)에 교비 장학생으로 편입했고, 고등과(高等科) 1학년 3학기 때 거족적인 3·1독립만세운동을 맞이했다.
3월 5일 남대문(南大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곧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귀향했다.
그 후 인근의 교회와 청신학교(靑新學校)를 돌아다니며 서울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고, 천안·연기(燕岐)·청주(淸州)·진천(鎭川) 등지의 교회·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운동을 협의했다. 또한 기독교 전도사인 조인원(趙仁元)‧김구응(金球應) 등과 만나 4월 1일의 아우내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당시 아우내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은 두 계열에서 계획되었는데, 그 하나는 홍일선(洪鎰善)·김교선(金敎善)·한동규(韓東奎)·이순구(李旬求) 등 수신면(修新面)민과 이백하(李柏夏)·김상철(金相喆) 등 성남면(城南面)·갈전면(葛田面)민들이고, 다른 하나는 조인원(趙仁元)·조병호(趙炳鎬)·유중권(柳重權)·유중무(柳重武)·유관순(柳寬順)·조만형(趙萬衡)·김상훈(金相訓)·김용이(金用伊) 등 동면(東面)민들과 박제석(朴濟奭)·박봉래(朴鳳來) 등 갈전면(葛田面)민들이었다.
이 두 계열의 주동자가 서로 연락을 취하여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합동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3월 31일 자정을 기해 다음날의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알리는 봉화를 요소마다 올렸다.
4월 1일 아침 일찍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안 일대뿐만 아니라 청주·진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장꾼을 가장한 시위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전 9시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이 모인 가운데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아 세우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아우내 장터는 삽시간에 시위군중의 만세소리로 진동했다. 이때 유관순 열사는 미리 만들어 온 태극기를 시위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시위대열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를 시위행진했다.
독립만세운동이 절정에 달하던 오후 1시경 시위대열의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 칼에 찔려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녀는 시위군중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메고 헌병파견소로 몰려갔다. 시위군중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체를 파견소 앞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했고, 일부 흥분한 청년들은 파견소의 뒤로 돌아가서 전화선을 끊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일본 헌병들은 파견소 안으로 들어가 숨어 버렸고, 시위군중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충돌 없이 곧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오후 2시경, 응원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 명이 트럭을 타고 도착하여 총검을 휘두르고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다. 이에 시위군중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일본 헌병들은 시위군중을 끝까지 추격하면서 발포하고 칼로 쓰러뜨렸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으로 인해 유관순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씨(李氏) 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당했다.
오후 4시경 유관순 열사는 좌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려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 조인원, 조병호, 김용이 등 40여 명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파견소장 소산(小山), 헌병 상등병 주곡(湊谷) 등 일본 헌병들에게 달려들어 강력히 항의했다.
그 결과 이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 검사국(公州檢事局)으로 송치되었다. 그녀는 여기서 공주 영명학교(永明學校) 학생대표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다 체포된 오빠 유우석(柳愚錫)을 만났으니, 그녀의 가족은 모두 조국의 광복을 위한 애국투사가 아닌 이가 없었다.
공주지방법원의 재판과정에서 그녀는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내릴 권리가 있지만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하며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를 보여주었다.
재판 결과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경성(京城)복심법원에 불복하여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되었는데, 여기에서도 아침저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여 갔고, 결국 3년형이 확정되어 서대문(西大門) 형무소에 감금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중에서도 어윤희(魚允姬)·박인덕(朴仁德) 등과 함께 지속적으로 독립만세를 외쳤고, 특히 1920년 3월 1일에는 3·1운동 1주년을 맞이하여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로 인해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고, 결국 1920년 9월 28일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인해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고, 그 애국충절을 기리는 국민의 염원을 반영하여 2019년에 대한민국장으로 서훈을 격상했다.
/ 이선희 기자